기업 의사결정의 무게추가 한쪽으로 기울 때, 시장은 가격으로 신호를 보냅니다.
한국 자본시장에서 오랫동안 회자된 ‘거버넌스 디스카운트’라는 말에는 이 메시지가 응축돼 있었죠.
2025년 8월 25일 국회를 통과한 2차 상법 개정안은 바로 그 기울어진 저울을 다시 수평으로 맞추려는 시도입니다.
특정 주주에게 집중돼 온 이사 선임 권한을 분산하고, 감사위원회의 독립성을 한층 끌어올리는 장치를 법률로 못 박았습니다.
무엇이 달라지나
이번 개정의 심장은 두 줄입니다.
첫째, 자산총액 2조 원 이상 상장회사에는 집중투표제를 반드시 도입하도록 했습니다.
집중투표제는 주총에서 여러 명의 이사를 선임할 때, 1주가 가진 표를 ‘선임 인원 수만큼’ 부여해 특정 후보에게 표를 몰아줄 수 있도록 하는 방식입니다.
그 결과, 지분율은 낮지만 뜻을 같이하는 주주들이 표를 한 후보에게 결집하면 이사회에 진입할 가능성이 커집니다.
과거엔 정관으로 이 제도를 배제해 소액주주가 사실상 활용하기 어려웠지만, 개정으로 대규모 상장사는 더 이상 배제가 불가합니다.
둘째, 감사위원을 다른 이사와 ‘분리’해 뽑는 인원을 1명에서 최소 2명으로 늘렸습니다.
감사위원 선임 때 대주주의 의결권을 3%로 제한하는 현행 틀이 실효성을 갖도록 ‘분리선출 대상을 확대’해, 이사회 내 감시 기능의 독립도를 끌어올린 셈입니다.
이 두 장치는 서로 보완합니다. 집중투표제는 이사회 구성(진입)의 다양성을 높여 소수주주의 의사를 반영하고, 감사위원 분리선출 확대는 진입 이후의 ‘감시 독립성’을 강화합니다.
즉 ‘누가 들어가느냐’와 ‘들어간 뒤 어떻게 견제하느냐’를 동시에 만지는 구조적 개편입니다.
특히 분리선출 2인 이상은 대주주가 일괄 선출 구도에서 비선호 후보를 초기에 걸러내던 관행을 약화시키며, 감사위원회의 내부 균형을 개선합니다.
이번 개정이 ‘강제성’을 가지는 점도 중요합니다.
일부 상장회사에 남아 있던 ‘형식적 도입·실질적 배제’의 그레이존을 법률로 닫아, 제도의 예측가능성을 높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이사회는 더 다양한 목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고, 감사위원회는 더 넓은 독립영역을 갖게 됩니다.
어떻게 통과됐나
안건은 2025년 8월 25일 본회의에 상정되어 재석 182명 중 찬성 180, 기권 2로 가결됐습니다.
명시적 반대는 없었고, 제1야당(국민의힘)은 표결에 불참했습니다. 전날까지 이어진 필리버스터는 표결로 종결되며 길이 열렸고, 여당 주도로 처리된 다수의 쟁점 법안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상법 개정안이었습니다.
이 표결 구도는 ‘여야 합의’가 아니었음에도 압도적 찬성 수치가 기록된 이례적 장면을 남겼습니다.
법안 자체의 내용은 기업지배구조 선진화라는 대의에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고, 1차 개정이 먼저 통과되며 ‘총론-각론’ 순서로 디딤돌이 놓여 있었다는 점이 작용했습니다.
정치적으로 보면 개정은 ‘자본시장 체질 개선’이라는 명분과 ‘경영권 안정’이라는 우려가 정면 충돌한 사안이었습니다.
여당은 소액주주 권익과 시장 신뢰 회복을 전면에 내세웠고, 야당은 기업활동 위축과 외부세력의 경영 간섭 가능성을 문제 삼았습니다.
다만 이번 2차 개정은 오랜 논쟁 끝에 축약된 형태, 즉 집중투표제 의무화와 감사위원 분리선출 확대라는 ‘핵심 모듈’만 추렸다는 점에서 정치적 조정의 결과물로도 읽힙니다.
여기에 1차 개정으로 ‘이사의 충실의무’를 회사에서 ‘회사 및 주주’로 확대한 흐름이 앞서 마련되면서, 2차 개정의 정합성이 강화된 점도 의석을 움직인 배경으로 평가됩니다.
언제, 어떻게 적용되나
시행 시계는 ‘공포 후 1년’입니다. 즉 법률 공포일로부터 1년이 지나야 효력이 발생합니다.
다만 집중투표제 의무화 조항의 실무적 적용 시점은 보다 구체적입니다.
대규모 상장회사의 경우, 개정 상법이 시행된 이후 ‘처음으로 이사 선임을 목적으로 소집되는’ 주주총회부터 집중투표 배제가 금지됩니다.
기업 입장에서 달력과 의사일정 관리가 중요해지는 이유입니다.
정관에 남아 있는 집중투표 배제 조항은 효력 정비가 필요하며, 주총 소집 공고·의안 구성·전자위임장·의안설명서의 표기 방식까지 손봐야 합니다.
감사위원 분리선출 2인 이상 규정도 병행 준비해야 합니다.
이사 선임 의안과 감사위원회 위원 선임 의안을 분리해 상정하는 절차 설계, 후보자 풀의 다양성 확보, 독립성 요건 재점검(겸직·거래·특수관계 제한 등), 위원회 규정 개정과 연동한 내부 통제 프로세스 업데이트가 핵심입니다.
요컨대, 법 시행일에 맞춰 서류를 고치는 차원을 넘어, ‘첫 적용 주총’에서 제도의 취지를 구현할 수 있는 운영 설계가 필요합니다.
특히 주주 커뮤니케이션 집중투표 절차 안내, 후보 추천 일정 공지, 의결권 행사 채널 고도화가 제도의 실효성을 좌우할 것입니다.
시장과 주주의 관점
해외 투자자들이 한국 시장을 평가할 때 반복적으로 지적해 온 대목은 ‘지배구조의 불투명성’이었습니다.
이사회가 사실상 대주주 의중을 반영하는 구조라면, 소수주주 관점에서 리스크 프리미엄을 얹을 수밖에 없죠.
이번 개정은 바로 그 비용 요인을 정면으로 다룹니다.
집중투표제 의무화는 이사회 진입 장벽을 낮춰 기업 거버넌스의 다양성과 감시 기능을 높이고, 감사위원 분리선출 확대는 회계·내부통제가 실제로 작동한다는 신호를 줍니다.
이는 장기적으론 할인 요인을 낮추는 방향입니다. 주요 언론 사설들도 이번 개정이 ‘지배구조 개선으로 이어질 전환점’이라는 점에 방점을 찍었습니다.
동시에 1차 개정에서 ‘충실의무’의 대상을 회사와 주주로 확대한 흐름과도 궤를 같이 하죠. 물론 제도 하나로 모든 것이 달라지진 않습니다.
이사회 구성의 다양성과 감사위원회의 독립성은 ‘법 조문+실무 운영’이 합쳐져야 결실을 맺습니다.
후보 발굴의 풀을 넓히고, 독립성 검증의 기준을 높이며, 이해상충 관리와 내부 제보 시스템을 활성화하는 등 자발적 개선이 맞물릴 때 시장은 프리미엄으로 보답합니다.
적극적 주주(activist)와의 상호작용도 이전보다 더 정교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대화 채널을 열고, 분기별 거버넌스 리포트를 공개하며, 중요한 거래·M&A 의사결정에서 절차적 공정성과 비교가능성을 문서로 남기는 것, 이 모든 것이 ‘디스카운트’의 실마리를 푸는 누적적 조치입니다.
재계의 걱정은 무엇이고,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경제단체들은 유감의 뜻을 밝혔습니다.
취지는 이해하지만, 외부 세력이 집중투표를 활용해 경영권에 영향을 미치거나, 소모적 분쟁이 잦아질 수 있다는 시나리오를 경고합니다.
또한 ‘합산 3% 룰’(최대주주 및 특수관계인의 의결권을 합산해 3%로 제한)과 결합될 경우 우호지분의 실질적 의결력이 크게 떨어질 수 있다는 분석도 제기되었습니다.
데이터 기반 분석을 내놓은 리포트에 따르면, 1·2차 개정 효과가 동시에 적용되면 주요 그룹의 우호지분 의결권이 큰 폭으로 제약될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옵니다.
이런 우려는 기업에 ‘리스크 관리’ 프레임을 요구합니다. 대응의 정석은 두 갈래입니다.
첫째, 분쟁 예방. 배당·자사주·투자·분할·합병 등 민감한 안건에 대해 조기 공지와 근거 데이터 공개를 강화하고, 사전에 주주와의 구조화된 라운드테이블을 운영해 갈등의 급전을 막습니다.
둘째, 분쟁 대응. 의결권 자문사의 가이드라인을 연구해 안건 설계를 최적화하고, 위임장 대결(proxy fight)이 예상될 때는 독립된 자문단과 함께 ‘사실·수치·대안’으로 승부하는 자료전을 준비합니다.
3% 룰과 분리선출 확대의 교차점에서는 감사위원 후보 라인업을 다변화하고, 독립성에 대한 시장의 질문에 미리 답하는 서면(FAQ 형식)을 공개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핵심은 ‘경영권 방어’ 자체가 아니라, 주주가치 최적화를 논리·데이터로 증명하는 능력입니다.
이처럼 이번 개정은 “이사회 진입의 문턱을 낮추고, 진입 후 견제의 벽을 높였다”입니다.
집중투표제 의무화와 감사위원 분리선출 확대는 소액주주가 회의장 문 앞에서 멈추지 않도록 돕고, 회의장 안의 감시 장치가 제대로 작동하도록 설계합니다.
그 과정에서 분쟁의 소음이 커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장은 원래 소란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불확실성을 싫어할 뿐이죠. 명확한 절차, 예측 가능한 정보, 일관된 데이터가 쌓이면, 소음은 점차 신뢰로 바뀝니다.
이번 개정이 제도적 신뢰를 회복하고, 한국 시장의 구조적 할인 요인을 줄이는 계기가 될지, 그 답은 이제부터의 실행에 달려 있습니다.
기업과 투자자, 규제기관이 함께 ‘운영의 품격’을 증명할 시간입니다.